[삶] "한국인 1명이 1년에 신용카드 50장 분량의 플라스틱 먹는다"
컨텐츠 정보
- 3,711 조회
- 0 추천
- 0 비추천
- 목록
본문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가 환경 생태 망친다"
"생태주의와 평화생명 존중으로 삶의 방식 전환해야"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대표
[촬영 이은도]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우리는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시스템에서 쓰레기를 대량으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태평양과 대서양 등의 바다에는 남한의 몇 배나 되는 초대형 쓰레기 섬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플라스틱입니다. 이 플라스틱은 햇빛을 받으면 미세한 조각으로 분해되고, 이를 플랑크톤이 먹고, 다시 물고기가 그 플랑크톤을 먹어서 결국 사람의 몸에 들어옵니다. 한국인은 1주일에 신용카드 1장 분량의 미세 플라스틱을 먹는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유정길(65) 불교환경연대 공동대표는 지난달 18일과 25일 연합뉴스와의 두차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 대표는 "인간과 환경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돼 있고, 서로 순환한다"면서 "현재의 환경 위기를 해결하려면 생명·생태주의 관점에서 우리 삶의 방식과 사회 시스템을 근원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1960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 와서는 미아리에서 성장했다. 그는 국민대학교 건축학과 재학 당시 야학 활동을 시작했고, 정부 주도의 학도호국단을 학생 자율조직인 총학생회로 바꾸는 총학생회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후에는 총학생회 임원으로서 개헌시위를 주도했고, 이 때문에 10개월간 감옥 생활을 했다.
그는 이후에 불교단체인 정토회에서 마음공부와 수행을 하면서 환경, 생태주의, 생명 운동과 평화운동 등 사회활동을 해왔다. 2002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4년간 긴급 구호와 주민 지원 활동을 펴기도 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월급도 없이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을 멈추지 않고 지속했다. 현재는 불교환경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부모님과 누나들, 동생과 함께 한 10세 당시의 유정길 대표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본인 제공]
-- 고향은 어디인가.
▲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에서 2녀 2남의 셋째로 태어났다. 누나 2명, 남동생 1명과 함께 성장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서울 미아리로 올라왔다.
-- 아버지는 서울에서 어떤 일을 하셨나.
▲ 아버지는 해병대 8기로 6.25 전쟁에 참전하셨다. 부사관이었는데, 5년의 의무 복무기간을 채운 뒤 제대하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농사일을 이어받으라 했지만, 아버지는 농사에 뜻이 없었다.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와서는 제약회사를 오래 다니시다 그만두고, 기와 공장을 비롯한 여러 사업을 하셨다. 집에 사출기 장비를 갖다 놓고 부엌 용품이나 장난감 등 여러 가지 플라스틱 제품을 찍어 납품하는 사업도 하셨다. 종업원은 없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매일 둥그렇게 모여 앉아 아버지를 돕는 작업을 하곤 했다. 사출기에서 나온 플라스틱 제품에는 삐죽 나온 부분이 있는데, 이를 칼로 깎아내 매끄럽게 만드는 일이었다.
-- 아버지 사업이 잘됐나.
▲ 사업이 어려웠다. 나는 아버지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3년간 중앙일간지 신문 배달을 했다. 300∼400부 정도였다. 당시에 배달 소년들은 지국의 총무들한테 학대받는 일이 꽤 있었다. 나는 독자들에게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기도 하고, 우수 배달 학생으로 뽑히기도 했지만, 월급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사업에 실패하신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갑자기 돌아가셨다. 폐렴에 걸리셨는데, 병원에 가면 금방 나을 병이었지만 돈이 들어간다면서 버티시다 돌아가신 것이다.
고교 1학년 때 기독교서클 연합모임에서 중창을 하는 유정길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
[본인 제공]
-- 학교에 다니는 데 문제는 없었나.
▲ 나는 중학교 때 학교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수업이 모두 끝난 다음에 선생님한테 몽둥이로 맞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등록금을 내지 않았다는 게 선생님의 구타 이유였다. 나는 그 시간이 무서워서 가출하고 싶은 생각을 자주 했다. 부모님께는 이런 상황을 말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 이를 알면 가슴 아파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가출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교회 덕분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누나의 소개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레크리에이션 행사, 퀴즈대회를 열 뿐 아니라 선물을 주곤 했다. 교회의 이런 문화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중고교 시절 내내 교회에서 총무, 부회장, 회장 등을 두루 거쳤다. 교회의 선배들뿐 아니라 목사님이나 장로님, 집사님들로부터 신뢰와 귀여움을 받았다. 후배들도 나를 잘 따랐다. 나는 교회에서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다.
-- 가정 생계는 누가 책임졌나.
▲ 가정주부로만 사셨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4형제를 키우기 위해 온갖 일을 하셨다. 집에서 하는 재봉일, 봉제뿐 아니라 북어, 미역, 김, 다시마 같은 것을 떼다가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파는 행상도 하셨다. 거리에서 떡볶이, 오댕(어묵) 장사도 하셨고 보험, 화장품 판매, 파출부 일도 하셨다. 큰누나는 여상(여자상업고)을 졸업한 뒤 바로 취업했다. 큰누나는 2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대학에 가고 싶어서 2∼3번 예비고사를 치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누나의 유품인 일기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데, 나는 그걸 읽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작은누나는 낮에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다. 작은누나는 결국 대학에 가서 화가가 됐다. 남동생도 야간 대학에 가려 했다. 동생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연수까지 받아 놓았을 때 나는 일반 대학에 가야 한다고 강하게 이야기를 했다. 결국 동생은 내 뜻을 따랐다.
-- 아들들은 정상적으로 대학에 다녔나.
▲ 대학에 들어간 아들들 때문에 어머니는 두 번이나 쓰러지셨다. 내가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됐을 때 파출부 일을 하던 중 한번 쓰러지셨다. 남동생이 대학교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됐을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굉장한 불효를 저질렀다.
대학 시절 야학 모임에서 유정길 대표(가운데)
[본인 제공]
-- 본인은 대학과 전공을 어떻게 선택했나.
▲ 재수한 뒤에 국민대학교 건축학과에 들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숨진 1979년이었다. 국민대학은 우리 집 담 너머에 있었기에 걸어서 5∼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차비가 들지 않아 좋았다.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나는 그림에 대한 열망도 있었는데, 국민대 건축학과는 조형대에 포함돼 있었다. 대학 시절 초기에 시각디자인 등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과 같이 데생이나 크로키를 할 정도로 내 미술 실력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누나 덕분이었다.
-- 대학에 들어가서 바로 학생운동을 했나.
▲ 1학년 때 학교 밖에서 야학 활동을 했다. 그곳에서 좋은 친구와 선배들을 많이 만났다. 야학을 하며 공장에 다니는 또래의 친구들도 만났다. 나는 이런 사람들과 밤새워 토론하며 고민이 깊어졌고, 이는 내 삶에 큰 영향을 줬다. 2학년 중후반에는 국민대 탈춤반에 들어갔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 탈춤반은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는 동아리였다. 3학년을 마친 후에 나는 군대에 가게 됐다.
-- 당시 운동권 학생들은 군대를 선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본인은 왜 군대에 갔나.
▲ 당시 학생운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 현장에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운동을 계속할지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집안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나만 바라보면서 고생하고 계셨고, 누나 2명은 남동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희생하고 있었다. 나는 군대에 가서 시간을 갖고 내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로 했다. 나는 논산훈련소를 거쳐 최전방 철책선에서 근무하게 됐다. 건축학과 출신이어서 공병대로 갈 줄 알았는데, 드물게 최전방에 배치됐다. 곧이어 나는 땅굴 탐지부대에서 복무하게 됐다.
-- 북한의 남침용 땅굴을 발견했나.
▲ 우리 부대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우리 사단 내의 양구 펀치볼에 있는 다른 부대가 땅굴을 발견했다.
-- 군대에서 땅굴은 어떤 방식으로 찾나.
▲ 먼저 산비탈을 횡단으로 깎은 뒤 시추 장비를 이용해 300∼400m 깊이로 땅속을 뚫고 내려간다. 20미터 간격으로 이런 작업을 한다. 그다음에는 시추장비 안에 계측기를 넣어서 전파를 보낸다. 시추 장비 사이에 공간이 있으면 전파의 흐름이 달라지기 때문에 땅굴이 있는지 파악된다. 밤에는 발파 소리가 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진동을 감청한다.
최전방 철책선에 군복무할 때 유정길 대표
[본인 제공]
-- 군대에서 인생 진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나.
▲ 고민이 많았다. 학생운동을 계속하면 결국 구속될 것이고,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동을 그만두고 일반적인 삶을 살면 경제적으로 나아지겠지만 신념과 양심에 어긋나서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 어떤 결론을 내렸나.
▲ 빈곤하고 어려운 삶이지만 신념대로 살기로 했다. 1984년 말에 제대하고 학교로 돌아와서는 총학생회 발족에 나섰다. 나는 총학생회 준비위원장이 돼서 1985년 봄에 총학생회를 출범시킨 뒤 총무부장을 맡았다. 이후 나는 여러 차례 학내외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 수배돼 3∼4개월간 도망 다녔다. 결국 1985년 가을에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재판에서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교도소, 안양 교도소를 거쳐 전주 교도소에 있다가 가석방으로 출옥했다. 투옥 생활은 11개월 정도 했다.
-- 출옥 후 바로 노동 현장에 갔나.
▲ 이후 6개월 정도 용접을 배우며 노동 현장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그러다 불교 월간지를 만들던 학교 선배를 보려고 사무실에 갔다가 수배 시절에 알았던 불교계 분을 다시 만나게 됐다.
-- 수배 시절에는 불교계 분들을 어떻게 알게 됐나.
▲ 아는 친구의 소개로 서울 봉천동의 한 절에서 숨어 지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법륜스님과 그 도반들을 만났다. 이후 법륜스님이 영남지역 불교 청소년 수련회를 한다고 해서 해인사에 함께 갔다. 스님은 나에게 고교 2∼3학년 담임교사를 맡아달라고 하셨다. 불교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그냥 아이들과 놀아주면 된다고 했다. 나는 이 수련회에 참가하면서 불교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 내가 잘 놀아줘서인지 아이들에게도 꽤 인기가 있었다. 수련회 마지막 날 아이들이 나를 헹가래 쳐주면서 좋아했다. 나와 정토회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새끼 돌보는 어미 흰뺨검둥오리
2024년 7월 3일 강원도 강릉시 경포 습지에서 흰뺨검둥오리 가족이 먹이활동을 하고 있다.
[유형재 촬영]
-- 환경문제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됐나.
▲ 1990년 이후 정토회는 새로운 전환을 모색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영향이 컸다. 이때 법륜스님이 생태 환경 문제에 관해 공부해 보라고 권유했다. 처음에 나는 거부했다. 생태 환경운동은 사회운동의 변방이고, 중요한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법륜스님이 여러 차례 권유하시는 바람에 스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생태환경주의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사회운동에 대해 새로 깨닫게 됐다. 나는 생태환경주의에서 새로운 진보의 길을 발견했다.
-- 새로운 진보란 어떤 것인가.
▲ 이제껏 사회발전과 역사 진보의 기준은 생산력의 고도화였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마찬가지였다. 두 사회시스템 모두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를 발전으로 봤다. 그러나 이런 풍요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현재의 환경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라는 것이 명백하다고 본다. 1992년 리우환경회의는 인류의 기존 발전개념을 단절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런 발전은 생태주의에서 가능하다.
-- 생태주의란 무엇인가.
▲ 모든 것이 연결돼 있고 서로 순환한다고 보는 사상 패러다임이다.
--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면 생태주의적 처방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 그렇다. 예를 들어 피부에 트러블이 생겼는데 근본 원인이 위장병인 경우가 있다. 이때 연고만 바르는 것은 올바른 처방이 아니다. 위장병을 고쳐야 한다. 지금 기후, 쓰레기, 오염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집중하는 것은 피부 트러블 치료에만 골몰하는 대증요법과 같다. 환경문제에 대한 원인 치료를 해야 하는데, 그건 생태주의 관점을 가져야 가능하다.
2024년 1월 화천산천어축제 인파
화천 산천어축제는 전국에서 양식한 60여만 마리의 산천어를 공수해 와서는 하천에 풀어놓고 잡는 방식이다. 화천에는 산천어가 살지 않는다. 이 축제는 생태계를 교란하고, 즐거움을 위해 동물들의 생명을 함부로 대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주최 측은 주민들의 생존권 문제여서 이 축제를 중단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연합뉴스 사진]
-- 생태주의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 기후환경 문제의 근본 원인은 산업사회의 무한 성장주의라는 것이다. 지구의 자원은 유한한데, 무한 채굴을 통해 수직적 경제성장을 지속해서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환상이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현재의 기후환경 문제다. 코로나, 사스, 메르스 등 감염병도 그 부작용이다.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고, 다른 생물과 환경은 인간이 정복하고 지배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많은 생물이 죽고 멸종하고 있다.
-- 인간중심주의 사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 우리는 인간에게 이로우면 익충(利蟲), 해로우면 해충(害蟲)이라고 한다. 인간에게 해충은 박멸 대상이다. 그렇지만 해충은 잠시 인간에게 해를 끼칠 뿐이다. 생태계 전체 차원에서는 해로운 존재라고 볼 수 없다. 사람이 뱀을 싫어하고, 소는 우직하다고 하고, 늑대는 음흉하다고 보는 것 자체가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다. 뱀이 독을 가진 것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지 일부러 인간에게 피해를 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뱀이나 지네 등이 혐오스럽다고 해서 야생에서 발견하면 함부로 죽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 주세요
2024년 6월 경기도 수원시자원순환센터에 플라스틱 재활용 쓰레기가 가득 쌓여 있다.
[홍기원 촬영]
-- 사람이 미세 플라스틱을 많이 먹고 있다고 하는데.
▲ 태평양의 하와이와 미국 본토 사이에는 남한 면적의 7배나 되는 쓰레기 섬이 있다. 해류 영향으로 돌고 돌다가 그곳에 모이다 보니 엄청나게 큰 쓰레기 섬이 됐다. 그런 쓰레기 섬은 인도양, 남북 대서양 등 곳곳에 있다. 이들 쓰레기의 대부분이 플라스틱이다. 인근에 있는 새와 어류들이 직접적 피해를 본다.
-- 사람은 그 플라스틱을 어떻게 먹게 되나.
▲ 플라스틱은 햇빛을 오래 받으면 잘게 부서진다. 플랑크톤이 이걸 먹고, 작은 고기들이 그 플랑크톤을 먹는다. 큰 고기는 이 작은 고기를 먹으면서 미세 플라스틱을 몸속에 농축한다. 결국은 사람이 어패류를 먹게 되니 인체에 미세 플라스틱이 축적된다. 한국인은 사람당 1주일에 신용카드 1장 분량의 미세 플라스틱을 먹는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 미세 플라스틱은 혈관을 통과할 정도로 크기가 아주 작은 것을 말한다.
--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야 하나.
▲ 커피숍에서 테이크아웃을 할 때 플라스틱 용기에 커피를 담아준다. 나는 그걸 금지했으면 한다. 사람들이 텀블러를 갖고 와서 커피를 담아 가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요즘에는 접을 수 있는 머그잔도 나왔다. 코로나 사태 이후 배달문화가 급속히 확대된 것도 플라스틱 쓰레기를 늘리고 있다. 배달되는 상품이나 음식의 용기는 모두 플라스틱이기 때문이다. 이를 종이로 대체해야 한다. 종이를 많이 사용하는 것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쉽게 썩기 때문에 플라스틱보다 낫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대표
[촬영 김수연]
-- 시민들의 어떤 운동이 필요한가.
▲ 첫째로는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감시하고 저항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위기이기 때문에 더 나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연을 개발하고 파괴하고 오염시킨다. 이런 것을 못 하도록 감시하고 반대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생태 친화적 생활양식을 만들어가야 한다. 물질적 소비를 적게 하고, 쓰레기 폐기물을 줄여야 한다. 가능하면 물건을 오래 쓰고, 충동구매 대신에 계획구매를 해야 한다. 서로 나눠 쓰는 공동체 방식으로도 물질 소비를 줄일 수 있다. 상품을 구입할 때는 친환경 제품을 선택했으면 한다
-- 국민 의식이 바뀌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