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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대신 춤추러 다니던 서울대생 “한우물 파라? 다빈치도 N잡러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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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성우 등 직업만 6개
‘프로 N잡러’ 이다슬

[아무튼 주말] N잡러/아무튼주말/이미지/7월27일자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아무튼 주말] N잡러/아무튼주말/이미지/7월27일자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저는 법조인이 될 수 없어요. 하고 싶지도 않아요.” 2012년, 스물다섯 살 이다슬씨는 부모 앞에서 선언했다. 부모는 강원도 강릉에서 전교 1등을 했고 서울대에 진학한 모범생 딸이 사법고시를 준비한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이씨는 연습실에서 쪽잠을 자며 춤을 추러 다니고 있었다. 단순한 취미가 아닌 전문 백댄서로.

사법고시 준비 대신 춤추러 다니던 서울대생 이씨는 현재 ‘프로 N잡러’로 살고 있다. N잡러란 두 개 이상 직업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말. 그의 직업은 성우, 아나운서, 요가 강사, 댄스 강사, 스피치 강사, 라이브 커머스 쇼호스트까지 6개에 달한다. 우리나라에서 직장을 다니며 아르바이트나 부업을 하는 N잡러는 지난 1년간 5만명(올해 2분기 기준) 늘어났다.

평생 직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이직이나 전직이 잦아지고, 본업 외에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진 시대다. 지난 6월 ‘안녕하세요, 프로N잡러입니다’라는 책을 내며 작가라는 직업까지 추가한 이씨를 만나서 물었다. 자칭 프로 N잡러에게 ‘직업’이란 대체 뭐냐고.

KT의 인공지능 '지니'의 목소리이기도 한 성우 이다슬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역할을 바꾸는 ‘프로 N잡러’다. 오전에는 요가 강사와 성우로 근무하고, 오후에는 아나운서, 저녁에는 스피치 강사로 변신하는 식이다. /김
KT의 인공지능 '지니'의 목소리이기도 한 성우 이다슬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역할을 바꾸는 ‘프로 N잡러’다. 오전에는 요가 강사와 성우로 근무하고, 오후에는 아나운서, 저녁에는 스피치 강사로 변신하는 식이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모범생 산골 소녀, 반기를 들다


-부모님은 사법고시 보길 원하셨다면서요.

“어릴 때부터 잘한다 잘한다 소리만 듣던 딸이었어요. 서울대 법대 출신 변호사로 진로를 명확히 조준하셨죠. 서울대 서반어과에 진학하긴 했지만 늦게라도 사시를 보면 붙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어요. 그런데 1차 시험도 떨어졌어요. 모범생 산골 소녀의 첫 실패였지요.”

-서울대까지 가서 왜 백댄서를 했나요?

“중고교 때 가수 보아를 너무 좋아했어요. 춤을 추고 싶어 무작정 댄스팀에 지원했고요. 새벽까지 연습하고, 담을 넘어 기숙사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빅뱅 전국투어 콘서트와 원더걸스 청룡영화제 무대에도 섰지요.”

-모범생 딸의 선언에 부모님도 놀라셨겠습니다.

“사시가 없어진다고 할 때라 당연히 로스쿨에 갈 거라 생각하셨나 봐요. ‘그동안 변호사를 하라고 했을 때 왜 한 번도 싫다는 말을 안 했냐’고 하시더라고요. 아버지는 한동안 연락마저 끊으셨지요.”

-그 후 N잡러의 삶을 살기로 한 건가요?

“아뇨. 댄스팀을 나왔지만 가수들 영상을 찾아보며 ‘저 뒤에 내가 있어야 하는데’라며 혼자 방에서 술 마시고 그랬어요. 전 남친을 잊지 못하는 여자처럼.”

①백댄서로 빅뱅 콘서트 무대에 섰을 때. 왼쪽에서 둘째가 이다슬씨. ②쇼호스트로 상품을 판매하고 ③스피치 강의도 한다. /이다슬씨 제공
①백댄서로 빅뱅 콘서트 무대에 섰을 때. 왼쪽에서 둘째가 이다슬씨. ②쇼호스트로 상품을 판매하고 ③스피치 강의도 한다. /이다슬씨 제공
이씨의 공식적인 첫 직업은 아나운서. 사법고시 포기 선언을 한 뒤 “방송 일을 하고 싶다”며 댄스 강사로 소일하는 딸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추천한 직업이었다. 스물여섯 살에 아나운서 준비를 한다고 하면 ‘늦깎이’라는 수식어가 붙던 때였다. 전주, 부산, 울산, 춘천 등 전국을 돌며 시험을 봤지만 번번이 탈락이었다. 아나운서 준비를 시작한 지 3년이 된 2014년 삼척 MBC 아나운서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2년짜리 계약직이었다.

-아나운서 계약 기간이 종료돼 다른 일을 찾은 건가요?

“여전히 방송에 대한 꿈이 있었기에 연기 학원을 다녔는데 또박또박한 제 아나운서 발음은 배우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성우는 목소리로 연기도 하고, 아나운서의 발성이 유리하잖아요. 어릴 때 공부 스트레스를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풀었던지라 성우들 목소리도 많이 들었고요. 2016년 KBS 공채 41기로 성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씨의 목소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다. KT의 인공지능 ‘지니’의 목소리와 삼성 AS센터에 전화를 했을 때 들리는 AI 상담 코멘트가 그의 목소리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롤)에서는 ‘렐’이라는 캐릭터의 목소리를 맡았다. 인천공항 주차장에서 결제를 할 때도 이씨 목소리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직업은 내 역할 중 하나일 뿐


성우는 2년 전속 기간이 끝나면 프리랜서가 된다. 전속 기간이 끝난 뒤 성우 녹음 작업은 한 달에 1~3건에 불과했다. 생활이 가능한 수입이 아니었다. 친구의 소개로 취업 준비생 앞에서 스피치 강의를 시작했다.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취미 플랫폼으로 요가와 댄스 수업도 개설했다. 과거 댄서팀 경력과 취미로 즐기던 요가를 활용해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이다. 아나운서 경력으로 기업 행사나 TV 프로그램 진행을 맡고, 라이브 방송에서 쇼호스트로 상품 판매에도 나섰다. 본격적인 N잡러로 들어선 것이다.

-6개의 직업을 다 하는 게 정말 가능한가요?

“핵심 직업은 성우예요. 댄스나 요가 강사는 가끔 수업이 잡히면 하고요. 오늘은 요가 수업과 녹음을 하고 왔고, 인터뷰가 끝나면 기업 행사 진행을 하러 가야 해요. 오늘은 요가 강사와 성우, 아나운서로 일하고, 지금은 작가로 인터뷰를 하는 거네요.(웃음)”

성우 등 직업만 6개인 ‘프로N잡러’ 이다슬씨. 서울 성수동 사델스 서울에서 이다슬씨와 만났다. 오전에 요가 강사로, 성우로 일하고 기자와 만나 작가로 인터뷰한 그는 아나운서로 행사 진행을 하기 위해 떠났다. /김종
성우 등 직업만 6개인 ‘프로N잡러’ 이다슬씨. 서울 성수동 사델스 서울에서 이다슬씨와 만났다. 오전에 요가 강사로, 성우로 일하고 기자와 만나 작가로 인터뷰한 그는 아나운서로 행사 진행을 하기 위해 떠났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이것저것 조금씩 손만 대는 건 아닐까요?

“저도 처음엔 ‘이것저것 조금씩 할 뿐이에요’ ‘반푼이예요’라고 말했어요. 겸손이라고 생각했는데 겸손을 핑계로 나를 폄하하고 있었구나 싶더라고요. 그거 아세요? 훌륭한 사람 중에는 N잡러가 많아요(웃음). 레오나르드 다빈치도 미술가이자 과학자, 철학가, 기술자였습니다.”

-평생 직장의 시대가 끝나고 N잡러의 시대가 온 건가요?

“저는 지금도 평생 직장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특정 분야를 깊게 파고드는 전문가가 아닌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로 사는 삶이 가끔씩 불안한 게 사실이거든요. 평생 직장이 좋은지, N잡러가 좋은지는 각자 성향에 따라 다를 거예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삶의 낙은 어떻게든 찾아야 하죠. 나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왜 좋아하는지, 내 안에서 꺼낼 수 있는 답을 많이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내 성향 파악도 가능하고요.”

-취미와 직업의 경계는 어디서 나뉩니까.

“취미로 ‘돈’을 벌 수 있으면 직업이 되지요. 어릴 때 ‘너 꿈이 뭐니’라고 묻는 게 무슨 직업을 갖겠냐는 뜻이잖아요. 취미나 꿈이 꼭 직업이 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현재 직업을 그만두고 꿈을 좇고 싶다며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무작정 꿈을 좇으라고 말하진 않아요. 취미나 꿈이 꼭 직업이 될 필요는 없죠. 다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 취미일 때는 남의 것을 빌려 쓰는 느낌인데, 직업이 되는 순간 완전히 내 것이 됩니다.”

그는 책에 “(본업이) 슬럼프에 빠진 사람들에게 N잡을 권유한다”며 이렇게 적었다. “때때로 직업은 시간적·심리적·체력적 여유를 전혀 허락하지 않은 채 사람의 숨통을 조이기도 한다. 그럴 때는 과감히 일을 버리는 게 어떨까… 그 직업을 버리면 나도 없을 것 같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살면서 맡은 수십개의 역할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이깟 직업’으로 여기고 몸과 맘이 잡아먹히지 않기를.”

작심삼일 열 번이면 한 달


이다슬씨는 "작심삼일이라도 열번이면 한달"이라며 꾸준히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강조했다. 사진은 서울 성수동 사델스 서울.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이다슬씨는 "작심삼일이라도 열번이면 한달"이라며 꾸준히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강조했다. 사진은 서울 성수동 사델스 서울.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고 해서 매분 매초 행복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가 이뤄낸 직업들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계속되는 실패에 위축되기도, 감당할 수 없는 갈등에 사람을 피해 숨기도 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6개의 직업을 갖게 된 비법을 묻자 이씨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작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다 보니 이곳까지 왔다는 뜻이었다.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써야 N잡러가 될 수 있을까요.

“물리적으로 남는 시간에 뭔가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체력이 부족해 쉬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N잡러가 되면서라도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면 새벽 2시에 퇴근한 뒤에도 할 수 있잖아요?”

-시간도, 체력도 없지만 N잡러를 꿈꾸는 사람이 해야 할 게 있다면.

“큰 성공보다 작은 성공에 집중하세요.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한 번 실패했다고 ‘망했어’ ‘때려치워’ 하는 경우가 많아요. 작심삼일도 열 번 하면 한 달이고, 그걸 열 번 하면 1년이 지나가죠. 사흘의 성공을 왜 하루의 실패로 없애버리나요.”

이씨의 직업이 더 늘어날지 궁금했다. “드라마나 영화 스토리 작가도 해보고 싶고, 웹툰도 그려보고 싶어요. 공부를 계속하면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7년에 하나씩만 이뤄도, 환갑까지 추가할 수 있는 직업이 3개 이상은 될 것 같아요.” 그를 만나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꼭 해야 하는 시기는 없구나. 절대 할 수 없는 시기도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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