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독까지 감행한 울산 부부간첩단
컨텐츠 정보
- 3,261 조회
- 1 추천
- 0 비추천
- 목록
본문
1997년 10월 27일 울산 최고 호텔인 코리아나호텔 커피숍. 잠복 중이던 안기부(현 국정원)와 경찰 대공수사관들은 긴장 속에서 주변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오전 11시30분경,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타난 젊은 부부가 포섭 대상자를 만나려는 순간 수사관들은 현장을 덮쳐 이들을 순식간에 검거했다. 이들 남녀가 이른바 '울산 출현 부부간첩' 최정남(당시 35세)과 강연정(28세)이다.
체포 다음날 음독 자살한 여간첩
이들은 북한의 대남공작부서인 사회문화부(대외연락부, 현 문화교류국) 소속의 부부간첩조로 1997년 8월 2일 밤 거제도 갈곶리 해안으로 침투하여 3개월 못 미치게 암약하다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강연정은 "나는 조국통일사업을 위해 왔으며 김정일 장군님을 배신할 수 없다"며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다, 다음날인 10월 28일 아침 화장실에서 신체 은밀한 부위에 숨겨 놓았던 독약앰플을 꺼내 씹어 자살을 기도했다. 즉시 병원으로 후송하여 치료했으나 10월 31일 사망하였다. 신체검사 때 여자 수사관이 항문 검사 등을 하였으나 여자의 은밀한 부위까지는 차마 검사하지 못한 탓이었다. 수사관들은 남편 최정남에게서도 항문 깊숙이 은닉해 놓은 독약앰플을 발견하였다. 독자들은 1987년 KAL 858기 납치범들이 바레인 당국의 조사를 받던 중 남자공작원 김승일이 독약앰플을 씹어 즉각 사망하고 여자공작원 김현희는 음독을 기도했으나 치료를 받고 살아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공작원들에 대한 북한의 세뇌형 자폭교육이 얼마나 집요하고 유효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부부공작조의 편성과 침투
간첩 최정남(가명 조주태, 백영기 등)은 1962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출생하였다. 사리원농업대에 재학 중이던 1984년 4월 당(조선노동당) 중앙위 직속의 대남공작부서인 사회문화부에 소환되어 공작원 교육을 받았다. 부친은 의주군 대문리 리당비서 출신이었다. 간첩 강연정(가명 최혜란, 박정화 등)은 1969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1989년 9월 고등중학교 졸업 후 당 사회문화부에 소환되어 공작원 교육을 받았다. 당시 아버지가 북한군 상좌(우리의 중령과 대령 사이 계급)였다. 이들은 출신성분, 사상성(충성심), 체력, 외모(여성) 등에 대한 철저한 심사를 거쳐 이른바 '새세대 공작원'으로 선발된 자들이었다. 세세대 공작원이란 1975년 6월 대남공작 부문에 대한 집중지도 검열 끝에 1976년경 대남공작사업을 장악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젊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전문 공작원 훈련과정을 통해 양성한 공작원을 뜻한다.
이들은 3년간 중앙당 정치학교에 수용되어 정치사상학습, 체력단력, 생존훈련, 통신훈련 등 공작원으로서의 기본과정을 이수하고 7개월간 평양 소재 순안초대소(간첩양성소)에서 심화 공작원 교육을 받았다. 이후 무려 15개월간 이른바 이남화 교육이라는 적구화(敵區化) 교육을 받으면서 말투부터 시작해 남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지리 등 전반적 사항을 습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한 TV 녹화 방송을 시청하고 신문 등을 접했다. 이른바 북한 표현으로는 '남조선 사람으로 개조'하는 교육을 받은 것이다.
1990년 11월 최정남과 강연정은 당의 지시에 따라 정식 결혼을 하고 부부공작조로 편성되었다. 해외 현지체험과 외국어 능력 배양을 위해 1994년 11월부터 1996년 3월까지 3차에 걸쳐 중국 선양, 광저우, 베이징, 선전, 주하이, 옌지 등을 여행했고, 1996년 8월부터 6개월간 중국 베이징의 컴퓨터학원에 다니며 현지 적응훈련도 받았다. 1997년 2월 담당 지도원으로부터 남조선에 침투하여 부부조로 활동하라는 지시를 받고 임무수행을 위한 실전훈련과 공작전술을 집중 학습하였다.
마침내 1997년 7월 30일 평양 초대소에서 권총 2정과 실탄, 무전기와 난수표, 위조 주민등록증, 위조 경찰 신분증, 독총, 독침, 독약앰플 등 공작장비와 공작금을 수령한 후 같은 날 19시 평안남도 남포항에서 공작모선에 탑승하여 출발했다. 서해 공해상을 거쳐 남하하다 8월 1일 중국 양쯔강 하류에서 간첩 보급선으로부터 유류와 식료품 등을 공급받고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였다. 8월 2일 거제도 남방 공해상에서 도착하여 호송 안내조 3명과 함께 반(半)잠수정으로 갈아탄 후 거제도 해안 500m까지 접근해 수영으로 수중 침투했다. 이들은 8월 2일 밤 11시30분 거제도 갈곶리 해안에 무사히 상륙한 후 버스 편으로 통영을 거쳐 창원으로 이동했다. 창원에서 여관에 투숙한 이들은 '무사히 도착하였다'고 이른바 안착(安着) 보고를 하였다.
서울대 교수와 전국연합 간부 접촉
이후 20여일 동안 경주, 울산, 전주, 부안 변산해수욕장, 광주, 수안보 온천, 이천, 용인, 수원, 서울 등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현지 적응훈련을 하였다. 또한 남파 때 소지한 위조 주민등록증에 기재된조주태(실존 인물)의 주소지인 부산에 가서 주변 지리를 파악하는 등 주도 면밀한 준비공작을 마치고 서울 구로동 소재 허름한 건물 2층에 월세로 입주하여 공작 거점을 확보하였다.
이들이 남파 때 부여받은 임무는 첫째 기 구축된 고정간첩(고영복, 심정웅)을 접선하여 지도검열할 것, 둘째 고정간첩 고영복을 통해 서울대 사회학교 김모 교수를 포섭할 것, 셋째 고정간첩 심정웅을 통해 서울지하철을 유사 시 마비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것, 넷째 새로운 포섭대상자인 재야운동권단체인 전국연합(민주주의 민족통일전국연합)의 울산연합 간부인 정모와 전주시 시의원 박모를 포섭할 것 등이었다. 또 부차적으로 우량 옥수수 종자(수원 19·20·21호) 입수, 남한 주민등록증 등초본 입수, 남한 정세 수집, 황장엽 소재 파악 등의 임무도 부여받았다.
이들은 먼저 1961년 포섭된 고정간첩인 고영복(서울대 교수·69세)을 1997년 9월 11일 접선한 후 10월 22일까지 4회에 걸쳐 만나 당의 조국통일상 수여 사실을 통보했다. 이와 함께 고 교수에게 한국 정치 정세와 학생운동의 전망 등 정세평가서 제출, 서울대 사회학과 김모 교수 소개, 경북대 김순권 교수가 개발한 우량 옥수수 종자 입수 등을 지시했다. 이들은 11월 5일 고 교수를 다시 만나기로 했으나 11월 27일 검거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서울 지하철 마비 위한 방법 보고받아
이들은 1958년 9월 남파된 5촌 당숙(심응섭·68세)에 포섭되어 2차례 입북까지 했던 고정간첩 심정웅(서울지하철공사 동작설비 분소장·55세)을 관악산, 한강둔치 등에서 6회나 접선하였다. 심정웅에게도 조국통일상 수여 사실을 통보하면서 대북 보고용 무전기 작동방법과 지령수신 해독법 등을 교육시켰다. 또 무전기 및 통신문건 등을 제공하였다. 이들은 심정웅으로부터 동조자 포섭 상황도 보고받았고 비상 시 해외도피 접선장소(베이징 천안문광장 인근 중산공원, 전화와 팩스번호 약정)도 가르쳤다. 또 심정웅으로부터 서울 지하철 주요 핵심시설 도면 및 직원편성표와 차량 현황도 입수했고 그에게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보내는 충성맹세문을 작성하도록 시켰다. 특정인에 대한 신원사항 파악 등도 지시했다. 특히 이들이 서울 지하철 마비를 위한 구체적인 장소와 방법 등을 보고받았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포섭대상 전국연합 간부의 신고
이들은 울산에도 내려가 그해 9월 21일 신규 포섭대상자로 선정한 울산연합 정모씨와 접촉했다. 사무실로 직접 전화해 울산시 학성공원 앞 다방에서 만나 대담하게 북에서 왔음을 밝히고 그간 활동에 대해 칭찬하며 같이 북에 갈 것을 제안했다. 이들이 첫 만남에서부터 대담하게 월북을 제안한 이유가 있었다. 포섭대상자를 선정하면서 울산연합 정모씨의 신원사항과 함께 운동권 잡지 '자주의 길 제3호(1995년 11월)'에 그가 기고한 북한 사회주의 찬양글인 '세상이 바뀌어도 원칙은 바뀌지 않는다' 등을 정밀 분석한 결과였다. 당시 정모씨는 이들의 월북 제안에 "농담하냐? 나를 어떻게 믿고 찾아왔느냐"고 의심하다 3일만 여유를 달라고 하였다. 정모씨는 운동권 선배들과 상의한 후 자기를 시험하려는 안기부 등 기관원의 공작이라고 판단하고 불고지죄를 면하기 위해 경찰에 신고하게 되었다. 만약 정모씨가 이들 부부를 정말 북에서 온 공작원이라고 믿었다면 과연 신고했을까?부부간첩조는 3일 후(9월 27일) 정모씨와의 약속장소인 울산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에 만나러 왔다가 검거되었다.
이 부부간첩의 최대 실수는 남파공작원의 신원확인 수단인 담보방송(특정일에 북한 평양방송을 통해 나오는 메시지로 확인)을 생략한 것이었다. 또 다른 포섭대상자인 전주시 시의원 박모씨는 관련자료를 수집하다가 검거로 인해 만나지 못했다. 이들 간첩은 남한침투 후 대북보고 4회, 지령수신 2회 등 총 6회에 걸쳐 북한과 통신연락을 하였다. 또한 경주 민속공예촌 야산 등 6곳에 드보크(Dvoke·간첩장비 비밀 매설장소)를 구축하고 권총 등 간첩장비를 은닉하였다.
이후 안기부는 이들로부터 찾아낸 총8곳의 드보크에서 체코제 32구경 권총 3정, 실탄 170발, 독총 18개, 독약앰플 5개 등 인명살상용 장비 10종 205점과 무전기 4대, 난수표·암호해독표·통신제원표 등 28매, 암호해독 책자 3권, 은서(恩書) 시약 2병, 은서용지 6매 등을 압수했다. 이러한 통신장비 16종 94점과 함께 위조 주민등록증 4매, 위조 경찰관신분증 1매 등도 압수했다. 이들은 남파 때 공작금으로 모두 3000만원(현재가치 5000만원 정도)을 지급받았으나, 이 중 700만원을 사용한 상태였다. 이들이 쓰고 남은 한화(98만여원)와 미화(5000달러), 일화(245만엔) 등도 압수했다. 당시 북한 공작지도부는 이들 부부에게 "나라에 돈이 떨어져가지만 대남사업 자금은 걱정 없으니 공작목적 수행을 위해 충분히 돈을 쓰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북한이 자기 주민들에게는 두 끼 밥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는 극심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대남 간첩공작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반문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서는 국내 종북세력을 혁명의 주력군화하기 위한 북한 대남공작의 집요함과 학계와 국가기간망까지 침투한 간첩망의 실체를 재확인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강연정의 음독자살에서 보듯 북한 간첩들의 소름끼치는 자폭정신 등도 엿볼 수 있다.
다음 회에서는 이들 부부간첩조가 지도검열한 서울대 교수 고정간첩망과 서울지하철공사 간첩망의 활동성에 대해 소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