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타버리기 직전…‘토스트 아웃’을 아시나요 [요.맘.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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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학원 강사로 일하는 안모(31)씨는 정규 근무 시간 외에도 ‘투잡’으로 과외를 병행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학원 수업 시간을 꽉 채운 채로 과외 2개를 병행하다 보니 하루도 쉬지 못하는 주가 이어졌다. 힘들다고 느낄 새도 없이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마치 ‘전원이 꺼진 것처럼’ 잠이 들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았다. 지치고 피곤한 상태에서 하는 일의 결과물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안한 감정이 들어 수업시간에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틈틈이 주어진 휴식 시간에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안씨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하는데 내가 뭘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안씨처럼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있지만, 업무 시간과 휴식 시간을 막론하고 피로와 무기력을 계속해서 느끼는 상태를 뜻하는 신조어 ‘토스트 아웃’(toast out)을 겪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번 아웃’(burn out)이 모든 기력을 잃고 완전히 타 버린 상태라면, 토스트 아웃은 ‘다 타버린’ 건 아니지만 속이 노릇하게 타기 시작한 단계를 의미한다.
‘서늘한 여름밤’이라는 필명으로 인스타그램에서 심리와 관련된 컷툰(모바일용 웹툰)을 연재 중인 심리학자 이서현씨는 “번아웃 이어 토스트 아웃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그만큼 괴로운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6.5만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한 이씨는 번아웃과 완벽주의 등을 중점적으로 연구한다. 현재 심리센터를 운영하며 번아웃 상태의 직장인, 너무 높은 삶의 기준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심리 코칭’을 진행하고 있다.
이씨는 다만 토스트 아웃으로 무기력 등에 빠지는 건 생존을 위해 몸이 발동한 일종의 ‘셧다운’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씨는 완전히 번아웃 상태가 되기 전 울리는 경고 사인인 토스트 아웃을 결코 가볍게 넘겨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쉽게 짜증이 나거나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고, 무기력하다면 일단 전조 증상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이씨는 “그럴 땐 그냥 쓰레기처럼 쉬라”면서 “그냥 핸드폰 좀 하다 자는 거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자신의 휴식을 가치판단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른바 ‘갓생’이 주목받는 시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 5일, 최소 8시간은 일하고, 퇴근해 저녁 차려 먹는 것만도 정말 잘하는 거고, 사실 어려운 일이에요. 그게 충분하다고 못 느껴 끝없이 몰아가다가 번아웃이 옵니다. (우리는)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다음은 이씨와의 일문일답.
‘서늘한 여름밤’이라는 필명으로 인스타그램에서 심리와 관련된 컷툰(모바일용 웹툰)을 연재하는 이서현씨. 이씨는 토스트 아웃과 번아웃에 수반되는 증상은 생존을 위해 몸이 발동한 ‘셧다운’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선영 기자
-번아웃 직전의 상태, ‘토스트 아웃’에서 주로 나타나는 증상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짜증이 대표적인 증상이다. 작은 일에 짜증이 나고, 감정 통제가 잘 안 되는 것 같은 느낌. 전조 증상 중 개인이 가장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불면이 있다.”
-굉장히 흔한 증상들이다. ‘내가 조금 예민해졌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맞다. 일을 마치면 완전히 ‘탈진’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많이 힘든 상태라고 본다. 예를 들어 이제 출근할 때 우리가 차를 보면서 문득 ‘뛰어들고 싶다. 근데 죽고 싶진 않고 다쳐서 한 달만 쉬고 싶어’ 이런 생각이 들면 토스트 아웃을 의심해 봐야 한다.”
-토스트 아웃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매일 전속력을 내서 달리면 토스트 아웃을 넘어 번아웃이 올 수밖에 없다. 노동 강도를 줄여야 한다. 그러려면 중요하지 않은 일은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도 필요하다. 다만 사회초년생이 스스로 그러긴 쉽지 않다. 직장인이라면 그럴 때 상사와 대화 나눠보라는 얘길 꼭 해주고 싶다.”
-상사와 대화를 나눈다고?
“과중한 업무를 버티다가 퇴사하느니 상사로서도 미리 대화해서 조율을 하는 게 낫다. 많은 직장인이 이걸 떠올리기 어려워하는데, 내 업무가 과중하다면 상사나 조직 내 사람들과 대화하고 조율할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개인의 입장에서 완전히 파업 상태가 되기 전에 회사 시스템 안에서 나를 돌봐줄 장치가 있는지 먼저 찾아보자는 것이다”
-잘 쉬라는 건데, 사실 잘 쉬는 게 뭔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라는 건가.
“그냥 확 쉬어야 한다. 토스트 아웃이나 번아웃이 된 사람들은 운동이나 다른 취미를 할 수가 없다. 저는 그냥 ‘쓰레기처럼 쉬라’고 말한다. 생산적으로 쉴 필요 없다. 그냥 릴스(인스타그램 숏폼 콘텐츠) 보고 핸드폰 보고. 자신의 휴식을 가치 판단하지 말아라.”
-‘쓰레기처럼’ 쉬라니.
“쉴 때는 자신에게 두 가지만 물어보자. ‘재밌어?’ 재밌어서 하는 일은 괜찮다. 보통 사람들이 굉장히 피곤한 상태에서도 핸드폰을 한다. 그건 그때 그 정도의 에너지밖에 없어서인데, 재밌으면 오케이다. 하지만 ‘피곤해?’ 그럼 자자. 이거 두 개만 기억해도 된다”
-단순하다. 재밌으면 하고, 피곤하면 자고.
“우리가 휴식에 대해서 가진 어떤 환상들이 있다. 독서 모임 가고 운동하는 게 잘 쉬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데 이 모든 휴식의 문화는 본래 귀족들의 것이었다. 귀족은 노동하지 않는다. 종일 심심하게 있던 사람들이 운동도 하고, 승마도 하고, 자기계발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노동도 하면서 귀족의 휴식 문화까지 향유해야 된다는 압박감을 받는 거다.”
-실제로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서 정말 열심히 사는 일명 ‘갓생’이 조명받는다. ‘유퀴즈 온더 블럭’이 방영되는 시간에는 방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부모님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인데, 너무 대단한 사람들만 나오니 자칫 나갔다가 같이 보게 되면 자신과 비교돼 괴로워진다는 얘기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행복해져야 한다. 퇴근하고 돌아와서 저녁 차려 먹고 핸드폰 좀 보다가 자는 것, 그걸로도 충분하다. 사실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취업을 해서 보통 주 5일, 최소 8시간 일한다. 혼자 살면 집안일도 해야 한다. 이것만 해도 정말 잘하는 거다. 그런데 아무도 충분하다고 이야기해주지 않고, 자신도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해서 자기를 끝없이 몰아간다. 번아웃에 이르러서야 ‘나 이제 진짜 못하겠다’고 하게 된다.”
본인이 만든 컷툰 캐릭터를 선보이는 이서현씨. 이씨는 토스트아웃과 번아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를 몰아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선영 기자
-토스트 아웃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요한 태도는 또 무엇이 있을까.
“토스트 아웃, 번아웃이 오는 사람의 특성은 삶의 모든 것이 일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시간을 일에 할애하고, 취미도 일과 연결된 것을 하고, 친구도 일과 관련된 친구가 많다. 다 일과 관련됐으니까 일이 흔들리면 내 인생이 흔들려 버린다. 이걸 경계해야 한다. 일을 망치더라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좋은 친구고, 취향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정체성이 여러 개가 있어야 한다.”
-팔이 부러지는 등 몸이 아프면 주위에서도 걱정하고 쉬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기력해지는 등 정신적인 증상은 주변 사람들이 잘 알아채지 못하고, 알더라도 게으르거나 의욕 없는 사람으로 오해받기 쉬울 것 같다.
“실제로 번아웃, 토스트 아웃의 대표적인 증상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냉담’이다. 번아웃이 온 사람은 겉으로 많이 힘든 티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짜증이 나 있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보여서 ‘저 사람 왜 저래’ 이런 느낌을 주기 쉽다.
-애매하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미워하게 될 것 같다.
“그렇다. 원래 안 그러던 사람이 지각을 자주 하거나, 같이 밥을 안 먹는다던가, 연락해도 대답도 잘 안 하거나 늦게 답장이 오는 등 예전에 하지 않았던 자잘한 실수들을 많이 하고. 그러면 주변 동료들이나 상사가 빨리 눈치를 채줘야 한다. ‘얘가 지금 힘들구나’ 하고.”
-토스트 아웃, 번아웃이 꼭 직장인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닐 텐데.
“공부하는 사람들도, 자영업자들도 모두 넓은 개념에서 노동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지칠 수 있다. 프리랜서나 자영업자, 학생의 경우에는 내가 이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 어떤 생활 방식이 필요한지 고민해야 한다. 내가 나의 리더니까. 가정주부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삶에서 힘든 부분이 있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은 없다. 다만 유독 정신건강 문제에 있어서는 ‘누구나 다 힘들잖아’라며 개선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들 힘들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 좀 더 나아가자면, 우리 사회 구성원이 모두 다 힘들다면, 이건 더 문제 아니겠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를 빼놓고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무조건 ‘본인이 본인의 정신건강을 관리하세요’라고 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