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번개할까요" 추억의 '천리안'…39년 만에 마침표 [한승곤의 문화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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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동호회 등 인기…채팅으로 만나 결혼까지
"어떻게 할까요" 진지한 고민에 각종 고민 상담도
'전화요금 폭탄'…웃지 못할 추억
포털 사이트 인기로 이제 역사속으로
영화 접속은 PC통신으로 사랑을 키워가는 남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채팅 문화를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영화 '접속' 스틸 컷
[파이낸셜뉴스] "아무래도 추억이 하나 없어지는 것 같아서, 좀 아쉬운 마음이 크죠."
메일, 뉴스, 운세 등을 서비스 하는 '천리안'이 오는 10월 31일 서비스 종료를 알린 가운데, 시민들은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천리안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천리안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국내 PC통신의 호황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서비스다. 당시 PC통신 기반으로 각종 동호회 등이 생겨나며 현재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카페, 온라인 커뮤니티 등 온라인 문화 정착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7일 ICT업계에 따르면 천리안 운영사 미디어로그는 최근 "함께했던 포털 서비스들이 하나, 둘 종료하는 시장 상황에서도 서비스를 지속하고자 노력했지만, 사업 환경의 변화에 따라 더 이상 양질의 메일 서비스를 유지하기 어려워 서비스 종료라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밝혔다. 이로써 천리안은 1985년 PC통신으로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39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사진=PC통신 천리안 접속화면 캡처
천리안에서 인기 있던 서비스로는 메일, 문자메시지(SMS), 뉴스, 인물·운세 등이 있었다. 특히, 천리안의 동호회 기능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아예 이를 통해 결혼까지 이어진 사례도 있었다.
1996년 2월 ‘한국PC통신’(현 케이티알파, 당시 하이텔 서비스 운영)이 하이텔 이용자 2,6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1.5%가 PC통신을 통해 이성친구를 사귄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이 중 180명은 결혼에 이르렀다고 한다.
PC통신을 통한 이성교제의 주요 통신 유형으로는 '대화실’이 50%로 가장 많았고, 이어 ‘동호회’(30.5%), ‘전자우편’(6.5%) 순으로 나타났다.
이는 PC통신이 당시 결혼 풍속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채팅을 통해 결혼에 골인한 부부의 인터뷰를 보면 남성 A씨와 여성 B씨는 1991년 8월 말 토요일 오후 PC통신 ‘직장인 동호회’ 회원으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들은 한 채팅방에서 직장 생활 관련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으며, 대화방 전체 인원은 6명이었다. 그러다 서울 시내 한 맥주집에서 실제 만남을 의미하는 '오프라인 모임’을 가졌고 처음으로 얼굴을 대하며 얘기를 이어갔다고 한다. 이후 A씨와 B씨는 같은 해 11월 30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결혼식 날 전자게시판에는 온통 결혼을 축하하는 메시지로 가득 찼다.
이런 시대상을 잘 반영한 영화도 있다. 1997년 9월 개봉한 한석규, 전도연 주연의 영화 '접속’은 PC채팅을 통해 사랑을 키워가는 남녀의 이야기를 잘 보여줬다. PC통신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사랑을 이야기한 이 영화는 제35회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으며, 그해 청룡영화상에서 최다관객상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전자게시판에는 각종 고민을 토로하는 일종의 온라인 상담소 역할을 하는 글들도 많았다. 한 사용자는 "천리안에서 만난 사람과 실제로 만나기로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에 많은 이용자들이 댓글을 달며 “꽃을 사서 가라”, "너무 긴장하지 말라"는 다양한 조언을 했다. PC통신이 단순한 정보 교환의 장을 넘어 사람들 간의 소통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역할을 보여준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영퀴방(영화퀴즈방)은 PC통신 시절의 인기 채팅방 중 하나였다. 이 방에서는 영화에 관한 퀴즈를 풀고, 영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영화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고, 퀴즈를 통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당시 '영퀴방’에 참여한 이용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40대 중반의 회사원 김모씨는 "하루 종일 어떻게 영화 퀴즈를 만들어낼까, 고민을 많이 했다"며 웃어보였다. 또 30대 후반 직장인 박모씨는 "영퀴(영화 퀴즈)를 잘 내면 인기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이 영퀴방 이용자들로 인해 영화 전문 잡지 <키노>와 <씨네21>이 인기를 끌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천리안과 관련한 에피소드 중 빼놓을 수 없는 얘기는 전화요금이다. 당시 PC통신은 전화선을 모뎀에 꽂는 방식으로 인터넷 접속을 하던 프로그램이었다. 모뎀은 전화선이나 케이블 네트워크를 통해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게 하는 장치다. 요금은 시간당 과금 방식이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이용자들이 '자발적인 요금 폭탄’을 맞기도 했다.
40대 회사원 이모씨는 "천리안 사용 후 요금 고지서를 받고 깜짝 놀랐다"면서 "당시 20대였는데, 부모님께 참 많이 혼났다"고 말했다. 이어 "채팅방에서 이 요금 문제로 또다시 이야기를 했던 추억이 떠오른다"고 덧붙였다.
사진=천리안 홈페이지
한편 천리안의 서비스 종료로 국내 1세대 PC통신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하이텔과 나우누리는 각각 2007년, 2012년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1984년 LG데이콤의 전신인 한국데이터통신의 전자사서함 서비스로 출발한 천리안은 이듬해인 1985년 9월 PC통신 서비스를 시작했다. 천리안은 1990~2000년대 초반까지 하이텔·나우누리·유니텔 등과 함께 4대 PC통신사로서 국내 PC 통신 시장을 이끌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랜(LAN)을 활용한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네이버·카카오(옛 '다음') 등 포털 중심으로 온라인 서비스 업계가 재편됐다. 이에 PC통신사들은 경쟁에서 밀리면서 하나둘씩 시장에서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