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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선물인가 인류의 재앙인가, 에어컨에 대한 ‘알쓸신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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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은 인간을 위한 발명품이 아니었다. 과도한 에어컨 사용이 인간의 기후순응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다. 그럴수록 에어컨으로 인한 전력 소모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인공지능(AI) 분야 프로그래머 김의현씨(가명)는 여름만 되면 공포에 떤다. 그는 더위에 유난히 취약하다. 영상 25℃ 정도만 되어도 땀을 줄줄 흘린다. 언젠가부터 에어컨 켜는 시점이 점점 빨라지더니 올해는 5월 말부터 에어컨을 돌렸다. 원격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업 특성상 6월 중하순 정도부터는 외출도 삼가고 집에서 24시간 에어컨을 튼다. 귀가했을 때 집 안의 열기를 견딜 수 없어 외출 시에도 에어컨을 틀어놓는다.

AI 개발자인 데다 틈틈이 가상화폐 채굴까지 나서는 그의 컴퓨터에는 전력 소모가 큰 최고급 CPU와 그래픽카드 등이 설치돼 있다. 여름만 되면 월 전기료가 수십만 원씩 찍히지만, 그는 에어컨 사용량을 줄일 생각이 전혀 없다. 날이 점점 더워지는 데다 습도 높은 날이 길어지고 있기에 에어컨을 더 많이 켤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그는 기후위기 이슈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에어컨이 전기를 많이 소모하고, 에어컨 냉매가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것도 알고 있다. 죄책감이 들 때도 있지만, 그에게 더위와의 싸움은 이미 생존의 문제다. 몸과 마음이 지치는 여름철이 되면 망설임 없이 에어컨 리모컨 버튼을 누른다. 이것이 김씨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7월15일 서울 남대문시장 인근 건물 외벽에 에어컨 실외기가 가득 설치돼 있다. ©시사IN 박미소
7월15일 서울 남대문시장 인근 건물 외벽에 에어컨 실외기가 가득 설치돼 있다. ©시사IN 박미소



도시에 사는 사람일수록 에어컨 없는 여름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식당과 마트부터 엘리베이터와 공중화장실까지,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 실내를 찾기 어렵다. 에어컨을 튼 채 문을 활짝 열고 영업하는 ‘개문 냉방’을 자제하자는 캠페인이 계속되지만 서울 명동 등 주요 번화가의 상점은 여전히 찬 바람을 밖으로 내보내며 손님을 유혹한다.

과거 에어컨은 부의 상징이었다. 한국갤럽의 연례조사에 따르면 국내 가구당 에어컨 보유율은 1993년만 해도 6%에 불과했지만, 역대급 폭염이 닥친 1994년 이후 늘기 시작했다. 1998년 24%, 2001년 36%로 증가하다가 2012년 74%, 2018년에 87%로 늘었다.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보유율이 무려 98%에 달한다. 에어컨은 이제 밥솥이나 냉장고 같은 ‘생활필수품’의 지위에 올랐다.

한국의 에어컨 보급률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다. 미국, 일본과 함께 에어컨이 많이 설치된 나라 ‘톱 3’에 꼽힌다. 2018년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 상위 3개국은 일본(91%), 미국(90%), 한국(86%) 순이다. 사우디아라비아(63%)나 중국(60%)보다 훨씬 높다. 유럽은 10%, 인도는 5%였다. IEA는 일평균 기온 25℃ 이상인 지역에 사는 인구는 28억명인데, 이 중 에어컨을 소유한 가구는 8%뿐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 자료는 6년 전 것이므로 그동안 변화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여름철에 크게 무덥지 않아 에어컨 보급률이 낮았던 유럽에서는 최근 10여 년 사이 폭염이 닥치면서 에어컨 보급률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에어컨 감사의 날(Air Conditioning Appreciation Day)’이라고 있다. 매년 7월3일이다. 1902년 7월 미국의 기술자 윌리스 캐리어가 에어컨을 발명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어떤 이들은 더위를 물리치게 해준 에어컨을 두고 ‘신의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에어컨은 사실 인간을 위한 발명품이 아니었다. 캐리어는 여름철 인쇄 공장에 습기가 많아 종이가 쭈글쭈글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에어컨을 만들어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1950년 윌리스 캐리어가 자신이 만든 원심 냉각기 앞에 선 모습. ©www.williscarrier.com
1950년 윌리스 캐리어가 자신이 만든 원심 냉각기 앞에 선 모습. ©www.williscarrier.com



에어컨 도입 이후 미국 노동자의 일상은 달라졌다. 과거에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날이면 노동자들은 일찍 퇴근했고, 상점과 극장도 일찍 문을 닫았다. 여름철 도심은 텅텅 비곤 했다. 날씨가 노동을 통제했다. 에어컨이 등장한 이후 기술이 노동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미국 최초로 현대식 에어컨을 설치한 곳은 땀 흘리는 블루칼라 노동자의 일터가 아니라 뉴욕 증권거래소였다. 당시에도 화이트칼라 노동은 컴퓨터 칩과 같아서 온도가 낮을수록 더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으리라는 인식이 있었다.

1930년대부터 미국 기업가들은 “에어컨이 경제성장을 자극하고 대공황을 끝낼 강력한 힘”이라고 말했다. 에어컨을 생산하는 제조업 일자리가 늘어날 뿐 아니라 낮이 긴 여름에 남아도는 전등 전력 잉여분을 에어컨이 소모할 수 있으므로 발전업체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미국 연방정부 전시생산국은 ‘개인적 쾌적함’만을 누리기 위한 에어컨 생산 및 설치를 금지하기도 했다. 도시 상점에 설치된 에어컨을 군수물자 공장으로 이전해 전쟁장비 생산 환경을 쾌적하게 하는 데 활용했다(스탠 콕스, 〈여름전쟁〉).

에어컨의 보급은 미국의 인구지도도 바꿔놓았다. 플로리다주는 캘리포니아, 텍사스에 이어 미국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2023년 기준 2261만명). 뉴욕주(4위)보다 인구가 많다. 지금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별장(마러라고 리조트)이 있는 아름다운 휴양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플로리다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여름철의 극심한 무더위와 모기 때문이다.

플로리다의 인구를 증가시킨 것은 에어컨이었다. 1960년대 이후 에어컨을 구매할 여력이 있는 이들이 플로리다로 모여들었다. 일부 부유층은 겨울철에만 휴양지로 이용하기 위해 플로리다에 별장을 지었다. 그들은 별장을 사용하지 않는 여름철에도 높은 습도로 자동차와 전자제품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에어컨을 틀어놓곤 했다.

2006년 에어컨 이용이 과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플로리다 지역 언론이 ‘에어컨 없는 집 세 가구’를 찾아내 기사를 써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중 한 명은 인터뷰를 통해 “에어컨이 없다면 플로리다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같은 해 〈뉴욕타임스〉는 맨해튼에 있는 여러 매장의 온도를 일일이 측정해 고급 상점일수록 에어컨을 더 세게 튼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업계 관계자는 기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최고급 에어컨 설비는 지위를 상징한다.”
 

7월15일 서울 명동의 상점들이 에어컨을 켠 채 문을 활짝 열어놓고 영업하고 있다. ©시사IN 박미소
7월15일 서울 명동의 상점들이 에어컨을 켠 채 문을 활짝 열어놓고 영업하고 있다. ©시사IN 박미소



에어컨이 무더위를 물리치고 노동환경을 쾌적하게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다. 여름철에 창문을 닫고 생활함으로써 모기 등 해충의 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점도 있다. 그런데 건강 측면에서 보면 에어컨 자체가 질병의 온상이 될 염려가 있다. 대표적인 질병이 레지오넬라균 감염병이다.
 

우리 몸속 ‘열충격단백질’을 아시나요



레지오넬라균은 에어컨과 샤워기 등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감염되면 무기력증·고열·두통·오한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항생제를 쓰면 80% 이상 증상이 완화되지만 사망자도 꾸준히 발생한다. 국내에서는 2000년 법정 감염병으로 지정된 이래 신고 건수가 증가하고 있다. 질병관리청은 올해들어 현재 확인된 국내 레지오넬라균 감염 환자가 5월11일 현재 101명이라고 밝혔다. 여름철 에어컨 사용량이 늘수록 발병 가능성도 높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2004년 “에어컨 시스템이 레지오넬라균이 번식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한다”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발병을 막는 방법은 에어컨을 자주 소독하는 것이다.

에어컨의 문제점 또 하나는 ‘더위에 대한 내성’을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사람은 보통 일주일가량 더위를 견디다 보면 땀샘이 활발해져 체온조절이 용이해진다. 이를 더위에 대한 ‘기후순응’이라 부른다. 과학자들은 기후순응 과정에서 ‘열충격단백질’이 생성된다는 점도 발견했다. 열충격단백질은 더위로 인한 불편에 더 빨리 적응하도록 돕는 물질이다. 미군의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매일 두 시간씩 10일간 더위에 노출돼야 기후순응 과정이 활발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류가 전기를 사용한 이래 최대 전력수요는 주로 긴 밤을 집 안에서 보내야 하는 겨울철에 피크를 찍었다. 에어컨이 보급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달라졌다. 최대 전력수요는 여름철 오후와 저녁으로 바뀌었다. 2022년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에어컨과 선풍기 등 공간 냉각장치로 쓴 전기소비량이 건물 부문 총 전기소비량의 약 16%를 차지했다. 폭염이 길어질수록, 인간의 기후순응 능력이 떨어질수록 에어컨으로 인한 전력 소모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에어컨은 영어로 ‘Air Conditioner’다. ‘공기를 조절’해주는 기계라는 뜻이다. 에어컨은 내부의 더운 공기를 냉매를 통해 흡수한 뒤 이를 다시 실외기를 통해 외부로 배출한다. 간단히 말하면 실내의 열기를 밖으로 빼내는 시스템이다. 미국의 기후 저널리스트 제프 구델은 저서 〈폭염살인〉에서 “에어컨은 결코 냉방 기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단순히 열기의 위치를 바꿔주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 공간에서 빼낸 열기는 결국 다른 곳으로 이동해 열기를 더할 뿐이다.

신형철 극지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지구의 에어컨은 따로 있다. 남극과 북극이다. 극지방이 태양빛을 반사해 지구의 온도를 낮추고(냉방), 전 세계 물의 2% 정도를 얼음 형태로 머금으면서(제습) 에어컨 기능을 해왔다. 그러나 지구 과열로 이런 에어컨 기능에 이상이 생겼다. 얼음이 사라진 극지는 더 많은 열을 품으면서 기온과 해수면을 끌어올리고, 이로 인한 피해는 다시 인간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122년 전 캐리어가 만든 에어컨 바람을 쐴 때, 한 번쯤은 망가져가는 지구의 에어컨을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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