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교육 어느 때보다 절실한데, 성평등 도서 열람 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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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성평등·성교육 도서 열람제한 및 폐기 사태에 대응하는 토론회
8월 28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성평등·성교육 도서에 대한 열람제한 및 폐기 사태 대응 토론회 - 성평등, 평등하고 자유롭게 배울 권리〉가 열렸다. (공동 주최: 경기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전교조 경기지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 ©일다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준 텔레그램 딥페이크(AI 기반 이미지 합성물) 성폭력 사건 소식이 연이어 계속 들리고 있다. 학교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 사태가 끔찍한 한편, ‘성교육, 성평등 교육의 뒷걸음질’이 결국 이런 사태를 낳았구나 싶어 씁쓸한 마음을 삼키게 된다.
“딥페이크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며, 참담한 심정으로 교육 현장에서 성평등, 성교육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8월 28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성평등·성교육 도서에 대한 열람제한 및 폐기 사태 대응 토론회 - 성평등, 평등하고 자유롭게 배울 권리〉에서 나온 이야기다.
성평등·성교육 도서에 대한 검열은 2020년 ‘나다움 어린이책 교육 문화 사업’부터 불거졌다. 정부가 성교육 도서들을 선정하여 초등학교에 보급하는 이 사업에 대해 일부 학부모 단체와 보수 국회의원이 ‘외설 동화’, ‘조기 성애화’, ‘동성애자 미화’ 등의 공격을 하자, 해당 사업을 담당한 여성가족부는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페루 홀름 크누센 지음, 정주혜 번역, 담푸스),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페르닐라 스탈펠트 지음, 이미옥 번역, 시금치) 등의 책들을 회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출판계와 여성계 및 시민사회단체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책 수거가 아니라 오히려 ‘포괄적 성교육’을 위해 더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성평등·성교육을 둘러싼 환경은 점점 더 우려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2023년부터 공공도서관 및 학교에서 성평등·성교육 도서 퇴출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 충남·충북 지역 공공도서관에서 시작된 도서 퇴출, 2024년 경기도 학교도서관 내 도서 대량 폐기 사태 등. 책을 둘러싼 검열과 폐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성교육을 섬세하게 다룬 스웨덴 책이 한국에선 유해?
8월 28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성평등·성교육 도서에 대한 열람제한 및 폐기 사태 대응 토론회 - 성평등, 평등하고 자유롭게 배울 권리〉가 열렸다. (공동 주최: 경기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전교조 경기지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 왼쪽부터 지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 박효진 초등교사, 타리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에브리바디 플레져랩 팀장, 정원옥 문화연대 집행위원 ©일다
현직 초등학교 교사인 박효진 씨는 “딥페이크 성범죄가 크게 불거진 요즘, 제대로 된 성평등 교육과 그것을 도울 성평등, 성교육 도서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낀다”고 말했다.
박효진 교사는 “우리의 지난 날을 돌이켜 보아도, 학생들과 잠시만 지내보아도, 학생들은 긍정적인 모습이든 부정적인 모습이든 이미 ‘성적 주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며, 일부 학부모 단체 및 보수 세력에서 이런 부분을 부정하기에 성평등·성교육 도서들이 퇴출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효진 교사는 현재 ‘문제’가 되는 책들을 살펴보았다며, “수많은 도서들이 퇴출 대상이 된 이유는 첫째,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 둘째, 청소년을 성적 주체로 인정하기 때문, 셋째 성적 쾌락을 언급하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특히 퇴출 요구를 받은 책 중 스웨덴 작가가 쓴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문예출판사)에 대해선 “남학생 성교육 책으로, 굉장히 다양하고 섬세하게 구체적인 성지식을 알려준다”며 이 책을 통해 “스웨덴의 성교육 강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이 책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심의했다가, 국내외 많은 비판이 쏟아지자 재심의 후 결정을 번복했다.)
“스웨덴은 1958년부터 성교육이 의무화 되었고 교육과정 안에서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중학교 생물 교과에서 성, 정체성, 관계 등을 주로 다루고 초등 고학년~중학교 사회에서는 주로 인권의 테두이 안에서 ‘UN의 아동권리법’이나 성, 성정체성 또는 표현, 인종, 종교, 장애, 성적지향, 나이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 성관계를 하고 싶다는 의사(Yes)나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때 성관계를 할 경우 강간이라는 ‘성교동의법’ 등을 알려준다.”
이 외에도 “스웨덴 교육에선 청소년기 몸의 변화와 성적인 행동, 자위 행위에 대한 부분, 육체적 접촉을 안내할 때 성교 외의 다양한 방식, 성과 관련해 어떤 어려움이 생겼을 때 상담할 수 있는 방법,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질투가 나거나 헤어질 때 상대방을 존중하는 방법 등 성은 인생의 한 부분이며 친밀한 관계 맺기라는 점과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안내를 가르친다”는 점을 평가했다.
박효진 교사는 “오늘 학생들에게 토론회에 나간다고 했더니, 자기들이 읽어야 할 책을 왜 못 읽게 하는 거냐, 학교에서 안 배우면 언제 어디서 배우라는 거냐며 응원해 줬다.”라는 말을 보태며 “성평등, 성교육 도서를 갖추고 유지하는 것을 넘어,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가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인티 차베즈 페레즈 지음, 이세진 옮김, 노하연 감수, 문예출판사) 스웨덴의 남학생 성교육 책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심의했다가, 국내외 많은 비판이 쏟아지자 재심의 후 결정을 번복했다 ©일다
‘금서 민원’ 도서관 검열의 배경에 차별과 혐오가 있어
정원옥 문화연대 집행위원은 “도서관에 대한 외압과 검열의 강도가 수그러들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금서 민원’을 제기하는 신청인의 다수는 보수 학부모단체와 우파 기독교 단체들이다. 이들은 도서관 현장, 국민신문고, 상위기관 등에 민원을 접수하는 것만이 아니라, ‘음란유해도서’의 폐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과 시위를 벌이는 등 전국적 규모로 운동을 키워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런 방식, 보수 우익 단체가 성평등·성교육 도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보수 정당 정치인이 이를 받아 검열을 제도화하는 패턴은 2020년 여성가족부의 ‘나다움어린이책 회수 사건’에서부터 반복되어 온 것”이라 지적했다.
“2024년 들어와선 경기도 내 학교도서관에서 2,528권의 성평등·성교육·페미니즘 관련 도서가 폐기되는 사태가, 지난 8월 13일에는 충남도의회가 도서관에서 ‘유해자료’를 배제하겠다는 「충청남도도서관 및 독서문화진흥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을 발의해 시민사회를 경악하게 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정원옥 집행위원은 근래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서 검열·금지 제도화 시도에 대해서도 설명하며 “미국의 도서 검열·금지 시도가 학교와 교실 내에서 소수 인종, 성소수자 등 특정 내용의 교육 내지 언급을 금지하려는 법안 제정 시도와 함께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짚었다. 또한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금서 민원’을 제기한 보수 우익 단체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해 온 단체들이기도 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차별금지법 제정 저지, 학생인권조례를 포함한 각종 지자체 인권조례 개정 및 폐지, UN 포괄적 성교육 반대, 건강가정기본법 개정 반대 및 가족구성권 3법 저지, ‘낙태’죄 헌법 불합치 이후 태아 생명보호 입법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왔다.”
정원옥 집행위원은 “여성과 성소수자의 권리 보장과 관련된 법·제도를 적극적으로 반대해온 이들이 성평등·성교육 도서를 검열하는데 앞장서는 건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지적하며, “성평등·성교육 도서에 대한 검열을 제도화하겠다는 건,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제도화하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 강조했다.
〈성평등·성교육 도서에 대한 열람제한 및 폐기 사태 대응 토론회 - 성평등, 평등하고 자유롭게 배울 권리〉에서 토론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장규진 전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 집행위원장, 기선 인천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가, 이혜선 인권교육공동체숲 활동가, 이선영 초등 사서교사 ©일다
책 읽는 사회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전국 최초로 민간위탁운영의 롤모델로 유의미한 활동을 이어오던 대전시인권센터가 예산 삭감을 당하고 센터장이 바뀐 이후 결국 운영 종료를 할 때까지, 센터에서 인권교육을 위해 일했던 이혜선 인권교육공동체숲 활동가는 “지금 성평등 도서의 퇴출 사태는 안타깝게도 예견된 일이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며 “보수 사회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시대를 거스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청소년에게는 성에 대한 알 권리뿐 아니라 향유할 권리도 있다. 하지만 (교육의 부재로) 지식을 잘못된 경로를 통해 혹은 왜곡된 성지식을 습득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현재 딥페이크 사건으로 사회가 떠들썩하다. 이러한 문제는 성에 관해 토론할 수 있는 자리,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가 없는 사회에서 비롯됐다. 아동·청소년이 성적주체로서 권리와 책임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필수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경기도 초등학교에서 사서교사로 일하고 있는 이선영 씨는 “지식은 무엇보다 빨리 앞서가고 도서관은 그것을 공유할 책임이 있다”며 ‘도서관의 지적 자유’를 강조했다. 하지만 현재는 그것을 지키기 점점 어려워지고 실정이다. 학교는 ‘학부모의 민원’에 민감해 지고, 이런 상황에서 사서교사 혼자 학생들의 알권리와 지식에 접근할 권리를 지키이 위해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선영 사서교사는 도서관과 책을 지키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동참이 필요하다며 “공공, 지역도서관 예산이 삭감될 때 연대해 달라. 책 읽는 사회를 두려워하는 누군가에게 주목해 달라. 열람이 제한되는 책이 있다면 그 이유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장규진 전 충남차별금지법제정연대 집행위원장은 김태흠 충남도지사를 비롯한 공직자와 지자체가 나서 성평등·성교육 도서를 폐기하는 사태를 “한국판 ‘분서’”라 평가하며 비판했다. 그리고 진시황의 분서갱유, 나치의 베를린 분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에서의 사상억압, 문화파괴 등의 역사를 짚었다. 마지막으론 베를린 베벨 광장에 있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귀를 전했다. “책을 불태우는 자는 결국 사람까지 불태운다.”
한국 사회는 검열되고 폐기된 성평등·성교육 도서와 함께 이미 많은 이들의 인권을 태워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이 불을 빨리 꺼야 학교까지 침투한 디지털 성폭력을 ‘수습’하는 게 아니라 진짜 예방과 교육, 미래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