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물유적] 1500년 전 신라인의 타임캡슐... 국보 '신라 비석 삼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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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로 지정된 신라비석 삼총사. 좌로부터 울진 봉평리 신라비, 포항 냉수리 신라비, 포항 중성리 신라비 |
ⓒ 국가유산청. 국립경주박물관 |
흔히들 우리의 장구한 역사와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반만 년의 역사를 가진 배달민족'이라는 수식어를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유산과 자료가 매우 부족하다.
이런 탓에 고대사 일부분은 주변 국가의 역사서에 기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며 현재까지도 많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우리 역사를 폄훼·왜곡하고 심지어는 자기네 것으로 날조하기도 한다.
아직 완벽하게 풀리지 않은 고대 역사를 온전한 우리의 것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연구와 노력과 투자가 필요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사학계에서는 역설하고 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고대사는 곧 우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문서로 남겨진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의 경우 당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돌이나 금속에 그림이나 글로 남겨 놓은 '금석문(金石文)'은 매우 중요한 1차 사료로 취급된다. 다른 유산에 비해 정확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2023년 말 기준 우리나라에는 358점의 국보가 있다. 그중 돌에 새겨진 금석문은 13점이 있다. 이 가운데 신라사람들이 남겨놓은 '비석(碑石)'이 9점을 차지하고 있다. 돌은 다른 재료에 비해 비교적 구하기가 쉽고 내구성이 강해 기록으로 남기기에 최적의 소재였기에 가능했다.
옛 신라 비석 중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 논과 밭 혹은 도로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우연히 발견한 3점의 비석이 있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됐지만 비교적 최근에 발견됐기에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신라비석 삼총사'를 살펴보자.
논바닥에서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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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울진군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에 전시 중인 국보 울진 봉평리 신라비 |
ⓒ 국가유산청 |
1988년 1월 20일.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 2리에 사는 농민 주두원씨는 농한기를 맞아 평소 경작하던 논의 땅심을 높이고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객토 작업을 하고 있었다. 포클레인을 동원하여 논바닥을 파던 중 커다란 바윗덩이가 포클레인의 삽날에 걸렸다. 논 가운데 머리만 내밀고 있는 큰 돌멩이가 농사짓는데 방해가 됐기에 주두원씨는 돌덩어리를 파내서 인근 개울가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고 같은 해 3월 중순 경 마을 이장 권대선씨는 개울가에 버려진 돌덩어리를 정원석으로 쓰려고 마을옆 공터로 옮겨 놓았다. 그렇게 한동안 방치되었던 돌에 묻은 흙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면서 바윗돌에 새겨진 많은 글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를 유심히 살펴봤던 권씨는 '이상한 돌이 나왔다'고 죽변면사무소와 울진군청에 신고했다. 울진군청의 문화재 계장은 몇몇 글자를 확인한 결과 오래된 비석임을 알아차리고 경북도청에 보고하였다. 이후 계명대학교 사학과 노중국 교수의 자문을 받은 결과 신라시대의 석비임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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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견당시 포클레인에 뽑히고 개울가에 던져지는 과정에서 비석 중간쯤의 글자들이 일부 훼손돼 판독할 수 없게 됐다 |
ⓒ 국가유산청 |
사학계의 비상한 관심과 고증을 마치고 마침내 그해 4월 15일. 대구 매일신문 1면에 "획기적 사료, 신라(新羅) 고비(古碑) 출토"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 됐다. 이렇게 논바닥에서 우연히 발견된 신라비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만약 마을 이장의 눈썰미가 없었더라면 봉평 신라비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돌덩이로 전락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발견된 지 10개월이 지난 1988년 11월 국보로 지정된 봉평리 신라비는 높이 204cm, 위폭 32cm, 아래폭 55cm이다. 사다리꼴 형태의 자연석 화강암에 글을 새겼다. 고구려 장수왕 3년(414)에 세운 광개토대왕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형태는 유사하다.
한쪽 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고 글자수는 총 10행 398자다. 아쉽게도 발견당시 포클레인에 뽑히고 개울가에 던져지는 과정에서 비석 중간쯤의 글자들이 일부 훼손돼 판독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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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 |
ⓒ 울진군청 |
비석은 서기 524년 신라 법흥왕 11년에 세워진 것으로 확인됐다. 비문에는 "법흥왕(모즉지매금왕)이 울진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편입하자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신라에서는 법흥왕과 13명으로 구성된 육부(六部)의 귀족들이 회의를 열어 대인(大人)을 파견해 난을 진압하고 지방관을 처벌하였다. 얼룩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하늘에 그 사실을 알렸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비석을 통해 당시 신라의 관등 체계와 국가 중대사를 왕과 6부의 귀족들이 의논해서 결정했다는 것과 신라에 성문법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됐다. 국보 울진 봉평 신라비는 원래 발견되었던 주두원씨 논에서 약 50m 떨어진 신라비 전시관에 전시 중이다.
빨랫돌이 될 뻔한 '포항 냉수리 신라비'
울진 봉평리 신라비가 발견되고 1년이 지난 1989년 4월. 또다시 고고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뉴스가 나왔다.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에 사는 20대 청년 이상운씨는 밭일을 하던 중 밭 가장자리에 박혀 있는 돌 하나를 발견했다.
돌은 땅 위로 약 15cm 정도 돌출되어 있어 농사짓기에 거추장스러웠다. 청년은 아버지와 함께 돌을 파내 빨랫돌로 쓰기로 하고 주변을 파기 시작했다. 땅밑을 한참 파내려 가자 높이 약 66cm 너비 74cm 두께 30cm 정도 되는 사다리꼴 모양의 납작한 돌이 드러났다. 빨랫돌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손수레에 실어 집으로 가져와 우물가에서 흙을 털어내고 깨끗이 씻어 보니 빼곡히 적힌 글자가 드러났다. 국보 '포항 냉수리 신라비'가 세상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평소 고고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청년은 실물 크기 그대로 비석의 명문을 모사해 심재완 영남대 명예교수와 계명대학교 노중국 교수에게 판독을 의뢰했다.
판독 결과 신라시대에 세워진 비석으로 확인됐고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비문에 '계미(癸未)'라는 간지(干支)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등의 칭호가 나오고 있어 봉평리 비석보다 21년 빠른 503년 지증왕 4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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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포항 냉수리 신라비 앞면(좌)과 뒷면(우) |
ⓒ 국가유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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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시 신광면 면사무소 내 비각에 전시 중인 포항 냉수리 신라비 |
ⓒ 국가유산청 |
명문은 비석의 앞면과 뒷면, 윗면에 총 231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다. 내용은 개인 간 재물을 둘러싼 민사소송의 판결문을 적어놓은 것이다. 1500여 년 전 포항 냉수리에서는 어떤 분쟁이 있었던 것일까.
대대로 이곳 진이마촌에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이 살았다. 절거리는 국가로부터 재산권과 상속권을 인정받았는데 어느 날 촌민인 말추와 사신지라는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지증왕과 각부의 귀족들이 합의하여 절거리의 소유권과 상속권을 인정하고 추후라도 말추와 사신지가 트집을 잡으면 중죄로 처벌하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6세기초 신라의 변방에서 발생한 민사소송의 판례를 기록으로 남긴 이 비석은 발견된 지 2년이 지난 1991년 국보로 지정됐다. 발견된 곳에서 멀지 않은 포항시 신광면사무소 앞마당 비각에 전시되어 있다.
포상금으로 5천만 원 받은 '포항 중성리 신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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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포항 중성리 신라비와 탑본. 현존하는 신라비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 국가유산청 |
2009년 5월 11일. 포항시는 '주민생활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포항시 흥해읍 중성리 일대에서 도로 개설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침 공사장 근처를 지나던 주민 김헌도씨는 공사 중에 나온 돌을 한쪽에 모아 놓은 돌무더기 속에서 크고 편평한 돌 하나를 발견했다.
화분 받침대로 쓰기에 제격이라 생각한 김씨는 집으로 옮기려 했으나 돌이 워낙 크고 무거워 바로 가져갈 수 없었다. 이튿날 돌 밑바닥에 지주목을 받치고 밧줄로 묶은 다음 조금씩 당겨서 겨우 집으로 운반했다. 그리고 돌을 정성스럽게 씻는 김씨의 눈이 반짝였다.
돌에 묻은 흙이 씻겨 나가면서 낙서처럼 새겨진 글씨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김씨는 매일신문사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제보했다. 신문사와 향토 사학자들이 비석에 새겨진 12행 203자의 비문을 판독한 결과 5~6세기 초에 만들어진 국보급 신라비석으로 추정했다.
이틀 후 5월 14일 아침. 경북매일신문에 "국보급 추정 신라비석 발견"이라는 헤드라인이 뜨고 학계와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그해 9월 국가유산청의 전신인 문화재청에서는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의 보상금 지급 규정에 따라 김헌도 씨에게 5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포상금을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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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경주박물관 신라 역사관에 전시 중인 국보 포항 중성리 신라비 |
ⓒ 국립경주박물관 |
그렇다면 중성리 신라비는 언제 세워졌고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걸까. 주요 내용은 앞서 살펴봤던 냉수리 비석과 같이 개인 간의 재산분쟁을 다루고 있다. 사간지궁과 일부지궁이라는 사람이 모단벌의 재산을 빼앗는 다툼이 발생했다. 이에 신라 중앙정부에서 진상을 파악한 후에 모단벌에게 재산을 돌려주라고 명하고, 이 건으로 다시 분란을 일으키는 자는 중벌에 처하겠다는 내용이다.
울진 봉평리비, 포항 냉수리비와 함께 '신라 3비'로 불리는 포항 중성리 비석은 논란이 있지만 501년 지증왕 2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존하는 신라 비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점이 중성리 비석의 가치를 높였고 포상금 5천만 원은 이를 반영한 것이다. 2015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처럼 논과 밭 도로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정원석이나 빨랫돌 혹은 화분 받침대가 될뻔하다 국보로 지정된 3개의 비석에는 6세기초 신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이 담겨있다. 마치 1500여 년 전 고대 신라인들이 후손들을 위해 묻어둔 '타임캡슐'과도 같은 소중한 기록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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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중성리 신라비. 서기 501년 지증왕 2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개인 간의 재산다툼을 신라 중앙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 국가유산청 |